(전두환이 사망한 2021년 11월 23일 페이스북에 올렸던 글을 옮겨 싣습니다.)
살인마 전두환이 죽었다. 죄송하다는 말 한 마디 없이 갔다. 저주를 퍼붓고 싶지만 참는다. 그때 나는 대학생이었고 금남로에 있었다. 그런데 비겁했다. 비겁해서 살아남았다. 그래서 평생 말을 못하고 산다. 서울 친구들한테 한 번 얘기했다가 야단을 맞았다. “니네가 폭도였잖아.” 눈을 부라리며 다그치는데 기가 막혔다. 설명을 해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입을 닫았다. 아직도 “북한군 개입" 운운하는 놈들이 있다. 전두환이 죽었으니 두 가지만 말하고 싶다.
# 공수부대를 투입할 상황이 전혀 아니었다
5월18일 오전 서둘러 광주행 시외버스를 탔다. 어머니 생신이어서 고향(장흥) 집에 갔다가 ‘계엄령 전국 확대’ 소식을 듣고 서둘러 광주로 향했다.
오후 2시쯤 전남대 정문 앞으로 갔더니 아무도 없었다. 전두환 신군부가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할 경우 정문 앞에서 모이기로 했는데… 누군가한테 물었더니 학생들이 광주공원으로 갔다고 했다. 시내버스를 타고 광주공원으로 갔다. 학생들은 그곳에도 없었다. 얼마 전에 쫓겨서 금남로 쪽으로 갔다고 했다.
금남로를 향해 걸어가다가 공수부대 군인을 처음 봤다. 전투복 차림이었다. 다들 등에 총을 비껴맸고 손에 몽둥이를 들고 있었다. 도망쳤다. 금남로를 지나 공용터미널 쪽으로 가면서 보니 무장한 군인들이 곳곳에서 시민들을 쫓고 있었다.
공용터미널 옆 시내버스 정류장을 향해 빠르게 걸어가는데 뒤에서 군인이 다그치는 소리가 들렸다. “야, 학생증 꺼내 봐!” 돌아보니 어느 젊은 여성이 지갑을 꺼내 뭔가를 보여주고 있었다. 군인은 그 여성의 팔을 움켜잡고 군용 트럭으로 끌고 갔다.
얼른 시내버스에 올라탔다. 그때 어느 사내가 창밖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야, 이 개새끼들아!” 곧바로 군인 한 명이 버스로 뛰어 들어왔다. “어떤 새끼가 욕했어!” 고함을 치더니 내 바로 앞에 앉은 젊은이를 끌고 나갔다. 그 순간 시내버스는 문을 닫고 출발했다. 무사히 농성동 집에 도착했다. ‘입주 아르바이트’ 하는 집이었다.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 전두환 신군부는 왜 그때 광주에 공수부대를 투입했을까? 바로 직전까지는 시민들이 평화롭게 가두시위를 했고 경찰은 질서유지만 했다. "전두환은 물러나라"고 외쳤을 뿐이고 이렇다할 충돌이 없었다.
# 왜 비무장 시민들을 조준사격했나?
공수부대 군인들이 비무장 시민들을 개 패듯이 두들겨패자 시민들이 꼭지가 돌았다. 저놈들 미친 거 아냐? 왜 우리 군인들이 선량한 시민들을 저토록 무자비하게 두들겨 패냐? 내가 죽으면 죽었지 저런 꼴은 못 보겠다. 이런 심정으로 광주 시민들이 시내로 몰려나왔다. 내가 금남로에 도착했을 땐 인파가 이만저만이 아니었고 함성이 요란했다.
나는 광주은행 사거리 대각선 쪽에 서서 지켜봤다. 현재 금남로4가역 1번 출구 바로 앞이다. 금남로5가 쪽에서 트럭 한 대가 오더니 도청을 향해 질주했다. 시민 서너 명이 타고 있었는데, 주먹을 치켜올리며 구호를 외쳤다. 시민들은 박수 치며 환호했다.
30초쯤 지났을 무렵, “따 따 따 따 따 따 따…” 총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일순간 침묵. 다들 총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잠시 후 트럭이 후진으로 돌아왔다. 적재함에 탔던 사람들이 모두 총 맞아 쓰러져 있었다. 여기저기서 비명이 나왔다. “오매 오매”, “은자(이젠) 총을 쏴 부네”, “야 이 개새끼들아.” 저절로 욕이 나왔다. 비무장 시민을 향해 조준사격을 하다니… 사람들은 군인들이 카톨릭센터 아니면 전일빌딩 유리창가에서 조준사격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얼마 후 또 한 대의 트럭이 금남로5가 쪽에서 달려 왔다. 더 많은 시민이 적재함에 타고 있었다. 예닐곱은 돼 보였다. 또 가면 죽을 텐데… 걱정스럽게 지켜봤다. 트럭은 도청을 향해 달려갔고 다시 “따 따 따 따 따…” 총성이 났다. 트럭이 후진해서 나오는데, 오매 오매… 다 쓰러져 죽어 있었다. 기가 막혔다. 비무장 시민들을 향해 어떻게 조준사격을 해서 죽인단 말인가. 여기저기서 비명… 욕설… 총 있으면 쏴 죽이고 싶었다.
잠시 후 금남로5가 쪽에서 장갑차 한 대가 달려왔다. 기아자동차 광주공장에서 가져온 장갑차인 듯 했다. 이번에는 아무도 박수를 치지 않았다. “오매 오매 으차쓰까, 또 죽을 것인디.” 장갑차에는 젊은이 한 명이 올라타 태극기를 흔들어댔다. 오, 태극기. 굿 아이디어. 설마 태극기 흔드는 시민까지 쏘진 않겠지,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따 따 따 따…” 총소리가 났고 장갑차가 돌아왔다. 총알이 목을 명중했는지 고개가 완전히 꺾여 있었고 피가 가슴으로 흘러 내렸다. “이 씨발놈들", “죽여 버릴 거야.” 남자들은 욕지꺼리를 했고 여자들은 울음을 터뜨렸다.
그날인가 그 다음날인가 오후에 금남로에 총이 풀렸다. “총 쏠 줄 아는 분들은 총을 들어 주세요.” 끊임없이 방송이 나왔다. 망설였다. 총을 들까 말까. 군부대 가서 3주간 훈련 받은 게 전부인 내가… 결국 총을 잡지 않았고 해질 무렵 농성동 집으로 갔다.
나는 비겁했고 총을 잡지 않았다. 그 후에도 총을 잡을 기회가 한 번 더 있었다. 게엄군이 도청을 점령하기 전날이었다. 총을 잡을까 말까 망설이다가 귀가했다.
다음날 새벽 가두방송 소리를 듣고 대문 밖으로 나갔다. “광주 시민 여러분, 지금 게엄군이 쳐들어 오고 있습니다. 모두 도청으로 나오셔서 우리 형제 자매들을 살려 주십시오…” 한전 쪽에서 가두방송이 들려왔다. 오매, 게엄군이 도청을 점령하는갑네. 남아 있는 사람들 다 죽겄네. 가 봐야 하는 거 아녀? 망설이다가 결국 가지 않았다.
훗날 온 가족이 함께 영화 ❮화려한 휴가❯를 보다가 가두방송 대목에서 울컥 눈물을 쏟았다. 그때 그 음성 그대로였다. 옆자리에 앉은 딸이 눈치 챌까봐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않았다. 애비는 비겁하게 살아 남았단다. 그래서 지금까지 아무 말도 못했단다. 이 짧은 글을 쓰는 것도 부끄럽고 부끄럽다.
(사족) 5.18 당시 전남대 학생들과 광주 시민들이 가장 많이 불렀던 시위가요는 ‘늙은 군인의 노래’를 개사한 ‘늙은 투사의 노래’였다. 내가 가르쳤던 초등학생 대용이 대원이도 이 노래를 흥얼거렸다. 나는 해마다 5.18이 오면 혼자 ‘늙은 투사의 노래’를 들으며 눈물 흘리곤 했다. 부끄럽고 미안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