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8월 23일 화요일

일부 대학생 창업이 취업용 '스펙 쌓기'라는데...

KAIST 2학년 학생인 안 모씨는 올해 초 친구 2명과 함께 창업해 은행권청년창업재단 디캠프(D.CAMP)에 입주했다. 이들은 ‘크라우드 소싱을 통한 데이터 분석 서비스'를 하겠다고 밝혔다. “졸업 후에 해도 늦지 않찮냐"고 했더니 “당장 해 보고 싶어서 셋 다 휴학했다"고 했다. 이들은 얼마 후 KAIST 선배 회사에 통째로 인수됐고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다. 요즘도 “복학 안할 거냐?”고 물으면 “아직 생각 없다"고 말한다.

최근 창업계에서는 ‘대학생 스펙 쌓기 창업'이 화제가 됐다. 일부 대학생 창업자들이 대기업 취업용 스펙을 쌓기 위해 창업한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린 게 계기가 됐다. 이 기사를 본 순간 KAIST 세 학생이 생각났다. 그들도 스펙을 쌓기 위해 창업했을까? 답은 명확했다. 아니다. 그들은 어느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사업에 매달렸고 “대학 졸업을 꼭 해야 하느냐?”고 필자한테 반문하기도 했다. 창업에 푹 빠진 젊은이들 같았다.

대학생 창업자 중에는 이들과 달리 대기업 취업용 스펙을 쌓기 위해 창업한 이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는 얘기를 종종 듣곤 했다. 화제의 기사에는 "상당수 대학생이 자신의 돈은 한 푼도 투자 안 하고 정부 지원금만 활용해 동아리 활동처럼 창업한다"는 얘기도 나오고, “창업 스펙이 잘 먹혀 멤버 8명 중 한 명 빼고 모두 대기업에 취직했다”는 얘기도 나온다. 창업이 ‘어학연수보다 좋은 스펙’이라는 표현도 있다.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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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계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스펙 쌓기든 아니든 대학생들이 창업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좋은 것 아니냐는 의견이 많았다. 김한준 알토스벤처스 대표는 페이스북에 ‘창업 해서 쓰고 단 경험을 하는 것은 좋다’, ‘대기업 갔다가 스타트업으로 갈 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썼다. 황병선 빅뱅앤젤스 대표는 ‘창업 경험을 취업에 활용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대기업도 창업을 좋은 경력으로 인정하는 게 현명하다'고 썼다.

디캠프는 최근 2년 동안 한양대에서 창업 강좌를 했다. 필자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여러분한테 창업하라고 말하진 않겠다. 창업하고 싶은 학생은 창업 하고, 취업 하고 싶은 학생은 취업 해라. 어느 길을 택하든 언젠가는 창업을 만날 것이다.” 이 학생들한테 디캠프 월례 데모데이를 관람하게 하고 소감을 물었다. 대부분 학생이 “신기하다"고 답했다. 학생들의 생각 폭을 넓혀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창업계가 염려하는 것은 ‘스펙 쌓기용 창업’이 아니다. 창업 열기만 뜨거울 뿐 좀체 ‘대박'이 터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난해 카카오가 김기사를 626억원에 인수한 것 말고는 대규모 스타트업 매각 사례가 없다. ‘대박'이 터져야 인재들이 창업전선에 뛰어들고, 좋은 스타트업이 나오고, ‘창업 선순환’이 완성될 텐데, ‘대박'은 커녕 ‘중박'도 드물다. 대기업으로서는 ‘인수할 만한 스타트업이 없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생각하기 나름이다. 예전에 비해 좋은 인재들이 창업에 나서는 것도 맞고, 창업 여건이 훨씬 좋아진 것도 맞다. 더 좋은 스타트업이 나오고 있고, 대기업들이 창업계를 많이 기웃거리고 있는 것도 맞다. 그렇다면 '대박'을 기대할 만도 하다. '대박'이 좀 터져 줘야 창업 생태계 선순환이 가능해진다. 더 많은 우수 인재들이 창업전선으로 뛰어들고 더 좋은 스타트업이 나오고... 대학생 창업이 취업용 '스펙 쌓기'란 말이 쏙 들어갈 거라고 생각한다. (끝)

한국경제신문 8월24일자로 출고했으나 지면사정 상 게재하지 못한 글을 그대로 블로그에 옮겨 실었습니다. /광파리


2016년 8월 3일 수요일

"아재, 제발 나이 좀 묻지 마세요"

은행권청년창업재단 디캠프(D.CAMP) 센터장으로 일한 1년7개월 동안 명함을 주고 받은 사람이 약 3000명쯤 된다. 이 명함을 들여다보다가 문득 발견한 게 있다. 이들 중 필자가 나이를 아는 사람이 열 명도 안된다는 점이다. 디캠프에서 ‘호랭이 클라스'란 강좌를 운영하는 1974년생 호랑이띠 투자자⋅창업자들 말고는 나이를 아는 이가 거의 없다.

필자가 나이를 묻지 않았고 그들도 나이를 물어오지 않았다. 창업계에서는 나이는 별 거 아니다. 많다고 대접해주지도 않고 적다고 하대하지도 않는다. 만나면 나이부터 따지는 우리네 풍토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지만 창업계에서는 나이를 묻지 않는 게 당연시되고 있다. 다른 곳 사정은 잘 모르겠고 적어도 ‘강남 창업계'에서는 그렇다.

간혹 창업 행사를 참관하려고 디캠프에 온 정부 산하기관 사람들이 슬그머니 나이를 물어올 때가 있다. 자신이 나이 많다는 것을 은근히 과시하고 싶은지, “OOO 상무 아세요? 제 3년 후배에요.” 이런 식으로 물어온다. “아, 그러세요”라며 웃어 넘기지만 뒷맛은 씁쓸하다. 굳이 나이를 따지면 동생뻘인데 형 대접 해달라는 얘긴가?

이럴 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아재, 나이 좀 묻지 마세요!” 창업을 통해 혁신하겠다는 판에 나이가 무슨 상관인가. 나이로 위아래 따지기 시작하면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살아남기 어렵다. “내가 해 봐서 아는데” 식으로 찍어누르면 누가 자기 생각을 말하려 하겠는가. ‘스타트업 문화'를 배우고 싶다면 나이 따지는 관행부터 바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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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지스탁 문경록 대표는 이런 얘기를 했다. 실리콘밸리 창업 스쿨 드레이퍼대학에서 연수하던 시절 자신이 동기 중에서 나이가 가장 많았다. 그래서 ‘팀장을 맡아야 하나’ 걱정했다. 아니었다. 나이 어린 똑똑한 친구가 팀을 이끌었고 다들 좋아했다. 그런데 한국 기자가 문 대표를 취재한 뒤 ‘드레이퍼대학 최고령 창업자'란 제목의 기사를 썼다. 문 대표는 “나이를 따지지 않아 좋았는데 그런 기사를 보니 황당했다"고 말했다.

구글 최고경영자(CEO)인 순다 피차이만 해도 그렇다. 피차이는 1972년생 인도인. 2004년 구글에 입사했고 10년 후인 2014년 42세에 쟁쟁한 선배들을 제치고 구글 CEO가 됐다. 이 바람에 피차이보다 나이가 많고 피차이보다 먼저 입사한 선배들이 한순간에 모두 부하직원이 됐다. 그래도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될 만한 사람이 CEO가 됐다’며 반기는 분위기였다고.

사실 나이가 들수록 나이를 따지면 손해다. 또래는 하나씩 멀어지고 아래 사람들은 자꾸 거리를 두려 하고… 놀아주는 이가 없다. 나이를 따지지 않고 ‘친구’가 되면 하이테크에 친숙한 젊은이들한테 틈틈이 배울 수 있다. 연륜을 활용해 도움을 줄 수도 있다. 영화 ‘인턴'에 나오는 70세 비서 벤(로버트 드 니로)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찬물도 위아래가 있다’고 하는데, 찬물까지 위아래를 따져야 한다면 혁신을 기대하기 어렵다. 장유유서(長幼有序) 기본정신까지 버리자는 건 아니다. 윗사람이든 아랫사람이든 서로 존중하는 게 맞다. 다만 혁신으로 국가 경쟁력이 판가름나는 지금은 나이 따지는 관행이 걸림돌이 된다는 얘기다. 자꾸 나이를 따지면 ‘아재'이고, 나이로 찍어누르면 ‘꼰대'다. 아재 취급, 꼰대 취급 받기 싫으면 나이를 묻지 말고 그냥 어울리면 된다. (끝)

한국경제신문 8월3일자에 실은 칼럼 원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