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IST 2학년 학생인 안 모씨는 올해 초 친구 2명과 함께 창업해 은행권청년창업재단 디캠프(D.CAMP)에 입주했다. 이들은 ‘크라우드 소싱을 통한 데이터 분석 서비스'를 하겠다고 밝혔다. “졸업 후에 해도 늦지 않찮냐"고 했더니 “당장 해 보고 싶어서 셋 다 휴학했다"고 했다. 이들은 얼마 후 KAIST 선배 회사에 통째로 인수됐고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다. 요즘도 “복학 안할 거냐?”고 물으면 “아직 생각 없다"고 말한다.
최근 창업계에서는 ‘대학생 스펙 쌓기 창업'이 화제가 됐다. 일부 대학생 창업자들이 대기업 취업용 스펙을 쌓기 위해 창업한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린 게 계기가 됐다. 이 기사를 본 순간 KAIST 세 학생이 생각났다. 그들도 스펙을 쌓기 위해 창업했을까? 답은 명확했다. 아니다. 그들은 어느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사업에 매달렸고 “대학 졸업을 꼭 해야 하느냐?”고 필자한테 반문하기도 했다. 창업에 푹 빠진 젊은이들 같았다.
대학생 창업자 중에는 이들과 달리 대기업 취업용 스펙을 쌓기 위해 창업한 이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는 얘기를 종종 듣곤 했다. 화제의 기사에는 "상당수 대학생이 자신의 돈은 한 푼도 투자 안 하고 정부 지원금만 활용해 동아리 활동처럼 창업한다"는 얘기도 나오고, “창업 스펙이 잘 먹혀 멤버 8명 중 한 명 빼고 모두 대기업에 취직했다”는 얘기도 나온다. 창업이 ‘어학연수보다 좋은 스펙’이라는 표현도 있다.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창업계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스펙 쌓기든 아니든 대학생들이 창업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좋은 것 아니냐는 의견이 많았다. 김한준 알토스벤처스 대표는 페이스북에 ‘창업 해서 쓰고 단 경험을 하는 것은 좋다’, ‘대기업 갔다가 스타트업으로 갈 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썼다. 황병선 빅뱅앤젤스 대표는 ‘창업 경험을 취업에 활용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대기업도 창업을 좋은 경력으로 인정하는 게 현명하다'고 썼다.
디캠프는 최근 2년 동안 한양대에서 창업 강좌를 했다. 필자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여러분한테 창업하라고 말하진 않겠다. 창업하고 싶은 학생은 창업 하고, 취업 하고 싶은 학생은 취업 해라. 어느 길을 택하든 언젠가는 창업을 만날 것이다.” 이 학생들한테 디캠프 월례 데모데이를 관람하게 하고 소감을 물었다. 대부분 학생이 “신기하다"고 답했다. 학생들의 생각 폭을 넓혀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창업계가 염려하는 것은 ‘스펙 쌓기용 창업’이 아니다. 창업 열기만 뜨거울 뿐 좀체 ‘대박'이 터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난해 카카오가 김기사를 626억원에 인수한 것 말고는 대규모 스타트업 매각 사례가 없다. ‘대박'이 터져야 인재들이 창업전선에 뛰어들고, 좋은 스타트업이 나오고, ‘창업 선순환’이 완성될 텐데, ‘대박'은 커녕 ‘중박'도 드물다. 대기업으로서는 ‘인수할 만한 스타트업이 없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생각하기 나름이다. 예전에 비해 좋은 인재들이 창업에 나서는 것도 맞고, 창업 여건이 훨씬 좋아진 것도 맞다. 더 좋은 스타트업이 나오고 있고, 대기업들이 창업계를 많이 기웃거리고 있는 것도 맞다. 그렇다면 '대박'을 기대할 만도 하다. '대박'이 좀 터져 줘야 창업 생태계 선순환이 가능해진다. 더 많은 우수 인재들이 창업전선으로 뛰어들고 더 좋은 스타트업이 나오고... 대학생 창업이 취업용 '스펙 쌓기'란 말이 쏙 들어갈 거라고 생각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