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7월 28일 금요일

호창성 대표 “아무리 급해도 함부로 뽑지 마라"

더벤처스 호창성 대표가 오늘 점심시간에 디캠프 입주 창업자들을 만났다. 호 대표는 부인 문지원과 함께 비키(Viki)를 창업해 2100억원에 매각한 뒤 더벤처스라는 벤처캐피탈을 설립해 한국 스타트업들에 투자하고 있다. 비키 시절에는 링크드인 창업자이자 ‘페이팔 마피아' 중 한 사람인 리드 호프만 등으로부터 투자를 받았다. 호 대표는 디캠프 창업자들한테 비키 시절 좋았던 일과 힘들었던 일, 리드 호프만 등으로부터 투자 받게 된 배경 등을 얘기했고 창업자들의 질문에 답했다. 질의응답 중 서너 개만 소개한다.


Q. 초기 스타트업이 투자를 받은 뒤 명심해야 할 점은 뭔가요?


A. 돈이 없다가 생기면 정말 행복하죠. (웃음). 그래서 팀 사이즈를 키우는 사례가 많은데, 돈이 생각보다 훨씬 빨리 떨어져요. 이 돈이면 24개월 견디겠다 생각했다면 12개월 지나면 떨어지거든요. 펀딩 받더라도 돈을 아주 아껴 써야 해요. 그리고 사람 채용도 아주 중요해요. 맘에 쏙 들지는 않지만 일이 급하니 뽑아야 하나? 결정하기가 힘들어요. 정답은 없어요. 마일스톤을 지키려고 조금 맘에 들지 않더라도 뽑기도 하는데, 이렇게 뽑은 사람이 나중에 짐이 되기도 하죠. 정말 맘에 드는 사람을 뽑아야 해요. 이게 중요해요.


Q. (비키가 실리콘밸리에서) 시리즈 A 투자를 15곳에서 받았는데 배경이 있나요?


A. 투자 유치 마무리가 힘들었어요. 9개월 이상 걸렸죠. (비키) 트래픽은 올라가고, 독창성도 있고, 가능성은 있는 것 같은데, 실리콘밸리에서는 알려지지 않은 팀이고, 아시아 기반 서비스가 미국에서도 먹힐지는 미지수고, 개발자는 집에서 일한다고 하고… 투자자들이 확신하지 못한 것 같았어요. 선뜻 투자 결정을 하지 못하는 분위기였지요. “아무개가 투자하면 나도 하겠다"는 식이었어요. 그러다 보니 다른 투자자를 소개해 주기만 했어요.


그러다가 일본계 투자자 한 분을 만났어요. 연속창업자 출신 투자자였죠. 나중에야 알았는데, 실리콘밸리에서는 신망이 아주 높은 투자자더군요. 이 분은 우리가 맘에 들었나 봐요. 리드 호프만을 자기가 설득해 보겠다고 했어요. 호프만은 그 전에 비키에 큰 관심을 보였고 투자하겠다고 했는데 이유 없이 연락이 끊겼거든요. 일본인 투자자는 호프만을 만나려고 집 앞에서 하루 종일 기다렸다고 해요. 호프만을 만나자마자 이렇게 말했대요. “비키에 펀딩 하겠다고 했다면서 왜 연락 안 했냐? 투자 할 거냐? 해라.” 그러자 호프만이 깜박 잊었다면서 투자 하겠다고 했대요. 호프만이 투자 한다고 알려지자 그제서야 다들 자기도 하겠나고 나섰어요. 그러다 보니 투자자가 열 다섯이나 됐지요.


Q. 창업자들이 피해야 할 투자자도 있나요? 어떤 투자자를 피해야 하나요?


A. 투자자 때문에 힘든 경우는 없었지만 투자자 때문에 시간 낭비한 경우는 많았어요. 투자자들이 도와주려고 하는데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도움 안되는 경우도 많았어요. 비키 비즈니스를 이해하지 못해 엉뚱한 사람을 소개해주는 바람에 시간을 낭비하기도 했지요. 투자자가 아무리 전문성이 있다고 해도 한계가 있어요. 투자자가 한 번 고민해 봤다면 창업자는 열 번은 고민해 봤을 거에요. 경험이 더 많다고 해서 윗사람이 아랫사람 대하듯 해서는 안돼요. 더벤처스의 경우에는, 이 사업 내가 하고 싶다, 내가 하면 이렇게 하겠다, 진짜 잘할 것 같다… 이런 생각이 들어야 투자를 해요. 그래야 가치를 더해줄 수 있지요.


Q: 비키를 경영하면서 안 좋은 결정을 한 때도 있었나요?


A: 안 좋은 결정이라? 사람에 관한 결정이었던 것 같아요. (별로 맘에 들진 않았지만) 급해서 뽑았는데, 마일스톤 달성도 못했고,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은 조직에 계속 남아 있고… 그런 일이 있었어요. 지금이라면 다른 결정을 했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사람 뽑을 때는 신중해야 해요. 맘에 쏙 드는 사람이랑 같이 하는 게 좋겠죠. (끝)


2017년 7월 22일 토요일

(안드로이드 팁) '내 휴대폰' 찾는 간단한 방법

휴대폰 찾는 간단한 방법. 안드로이드폰 사용자이고, G메일이든 구글포토든 구글 계정으로 로그인 한 상태라면…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다.


1. 구글 검색창에서 ‘내 휴대폰 찾기’ 입력.
   (영어로는 Where is my phone?)
   구글 계정으로 로그인 한다.


2. 지도에 폰 위치가 뜬다.
   하단 ‘Ring’ 클릭해 벨소리를 울린다.


(참고) 좀더 자세히 보려면 지도를 더블클릭 한다.


이 화면에서도 폰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고,
벨을 최장 5분 동안 울릴 수도 있다.
폰이 진동으로 설정돼 있어도 벨소리가 울린다.
휴대폰을 원격 잠금할 수도 있고,
휴대폰 콘텐츠를 원격 삭제할 수도 있다.
배터리가 몇 % 남아 있는지 확인할 수도 있다.
구글 ‘폰 찾기' 기능은 안드로이드폰만 가능하다.

그런데... 이런 건 몰라도 된다.
폰은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지 않은가.
절대로 절대로 분실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 (끝)

2017년 7월 18일 화요일

“태풍이 불면 돼지도 난다”…‘창업가의 일’

‘창업가의 일'. 구글캠퍼스서울 임정민 총괄이 이런 제목의 책을 냈다. 택배로 보내온 책을 하루 밤에 후딱 읽었다. 임 총괄은 실리콘밸리에서 공부했고, 미국 스타트업에서 일했고, 한국에서 창업했고, 엑싯(지분처분) 했고, 투자도 했고, 창업자들을 돕는 일을 하고 있다. 창업과 관련한 거의 모든 일을 경험했다. 그래서인지 글이 정확하고 메시지가 확실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제프리”(임 총괄의 영어 이름)한테 카톡을 보내 점심 같이 하자고 했다. 창업계 얘기나 하고 싶었다. 제프리가 좋다고 해서 날짜를 잡았는데, 욕심이 생겼다. 둘이 주고받는 얘기를 창업자들이 듣게 하면 어떨까? 창업자 몇 분을 합석시키면 어떨까? 제프리가 “좋다”고 해서 디캠프 입주 스타트업 대표들한테 단체카톡을 날렸다. 두세 분이 합석하면 좋겠다 생각했는데 여덟 분이나 지원했다. 나중에 두 분이 추가로 합류했다.


오늘 디캠프 4층 세미나실에서 제프리와 함께 점심을 먹었다. 정사각형으로 둘러앉아 각자 소개를 한 다음 ‘창업가의 일'에서 발췌한 13개 키포인트 화면을 보면서 제프리의 얘기를 들었다. 제프리는 각각의 포인트에 대해 평균 5분 가량 설명했다. 중간중간 창업자들이 질문을 했고, 제프리가 답변을 했다. 한 시간 30분 동안 진행된 제프리와의 점심 이야기를 따로 정리하진 않았다. 책 내용을 발췌한 13개 키포인트만 공유한다.

















2017년 7월 13일 목요일

페이스북 사용자 4가지 유형 : 나는 어디에 속하나?

페이스북 사용자는 천차만별인데, 브링검영대학교 연구팀은 4가지 유형으로 나눴다. “relationship builders,” “window shoppers,” “town criers,” “selfies”. 우리말로 옮기기가 쉽지 않다. 관계형성자, 구경꾼, 소식전달자, 자기만족자(?) 정도가 될 것 같다. 조사대상자들한테 48개 질문을 던져 답을 보고 분류했다고 한다. 미국인 18~32세를 대상으로 조사/분석을 했기에 우리와 맞지 않을 수도 있다. 또 같은 사람이라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유형이 달라질 수도 있다. 쿼츠 기사를 간추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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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Relationship builders : 이 유형의 사용자들은 예전에 편지를 쓰고 유선전화를 쓸 때와 마찬가지로 친척 친구들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해 페이스북을 사용한다. 이들에겐 페이스북은 오프라인 생활의 연장이다. 한 마디로 정의하면, ‘페이스북은 내가 가족한테 사랑을 표현하고 내 가족이 나한테 사랑을 표현하는데 도움이 된다’. 이 유형의 사용자들은 페이스북을 공개공간으로 생각하기보다는 친구 친척과 자유롭게 사생활을 얘기할 수 있는 작은 허브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사진이나 동영상을 많이 올리기도 하고 많이 보기도 한다. 이들은 대개 다른 사람이 올린 포스트에 댓글을 달고 대화에 참여한다.


2) Window shoppers : 요즘 세상에서는 페이스북 안 쓸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이들은 사적 정보나, 사진, 글 등을 좀체 올리지 않는다. ‘좋아요’ 누르지도 않고 댓글도 좀체 달지 않는다. 한 마디로, “페이스북에서는 내가 관심 갖는 사람들의 프로필을 쉽게 볼 수 있고, 이들이 무엇에 관심 갖고 누구랑 어울리는지 알 수 있다”, “사람들과 연결돼 있으려면 페이스북 사용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말한 이도 있었다. “페이스북 바깥의 삶을 더 좋아한다", “페이스북은 내 일상생활을 올리는 공간이 아니다. 내가 토요일에 무엇을 했는지 굳이 올릴 필요가 없다. 그걸 알고 싶어하는 사람은 나랑 같이 있었을 거 아니냐.”


3) Town criers : 1인미디어를 추구하는 사람, 기자, 사회활동가, 이벤트 실행자 등. 이들은 페이스북을 ‘연단’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의 경우엔 페이스북 가상공간이 꼭 현실세계와 닮은 것은 아니다. 이들은 알리고 싶은 정보를 널리 알린다. 대상은 가까운 지인부터 별로 관계가 없는 사람까지 다양하다. 이들은 남들을 팔로잉 하는데 별로 관심이 없다. 포스팅을 해놓고는 남들이 그걸 좋아하든 말든 관심 꺼 버리는 때도 있다. 이들은 큰 이슈가 터지면 마구 떠들고 최신 동향을 알린다. 이런 걸 하기에 가장 편한 곳이 페이스북이라고 생각한다. 사적인 정보는 별로 올리지 않는다. 이들이 페이스북에서 소통을 많이 하지 않는 것은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다. 이들은 (친척 친구과) 소통할 땐 폰이나 문자나 DM을 택한다.


4) Selfies : 우리한테 아주 친숙한 유형이다. 이들은 관계형성자들과 마찬가지로 페이스북에 사진을 올리고 동영상 올리고 현재 상태를 알린다. 관심 끌기 위해서다. ‘좋아요’가 많이 오르고 댓글이 많이 달리면 힘을 얻는다. 이런 식이다. “내가 올린 글이나 사진에 ‘좋아요'가 많으면 많을수록 동료들한테 더 많이 인정받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사진 찍어서 폰에 그냥 두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그런데 그걸 페이스북에 올리면 내가 뭔가를 하고 있다는 결 보여주게 된다.”


여기까지다. 페이스북, 참 오묘하다. 페이스북 타임라인을 들여다 보고 있으면 다양한 사람들의 숨결이 느껴지고 향기가 느껴지고 분노가 느껴진다. 실제 모습과 다를 수 있다. 실제보다 예쁘게 꾸며진 모습일 수도 있다. 행간을 읽으면 오프라인에서 알지 못했던 특성도 느낄 수 있다. 페이스북 사용자 4가지 유형, 대체로 수긍이 간다. 그럼 나는? 광파리 페이지는 (3)번 Town Crier, 김광현 프로필은 (1)+(4)인 것 같다. (끝)

2017년 7월 5일 수요일

알토스벤처스 대표 “투자할 때 창업 경험 있는 창업자를 선호한다"

퇴근 길에 스타트업얼라이언스에서 알토스벤처스 김한준(“한킴”) 대표의 투자 이야기를 들었다. 최근 김 대표를 만나 한참 동안 얘기를 나누긴 했지만 무슨 얘기를 할까 궁금해 가 봤다. 알토스는 2012년부터 한국에서 투자하고 있는 실리콘밸리 벤처캐피탈로, 쿠팡, 배달의민족, 미미박스, 비바리퍼블리카 등에 투자했다. 김 대표의 이야기, 재밌게 들었다. 특히 '토스' 서비스로 유명한 비바리퍼블리카 투자 과정 이야기가 재밌다. 조금만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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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펀드마다 기업가치 1조원 이상의 기업을 하나씩은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느 순간 매년 이런 기업 하나쯤에는 투자하고 성장할 수 있게 도와주자는 것으로 목표를 바꿨다. 우리 목표는 투자한 모든 회사가 안전하게 성장해 엑싯(exit, 투자금 회수) 하는 것이 아니다. 투자한 회사 중 소수는 매우 크게 성장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훗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회사에 투자하는 것… 그것이 가장 큰 목표다.

"투자기준이 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우리는 팀을 보고, 시장을 보고, 그리고 ‘왜 지금이냐?’를 많이 생각한다. 투자한 직후에는 사업이 잘 안 되고 10년 뒤에야 사업이 되는 사례를 많이 봤다. 조금 늦게 시작해 망하는 확률보다는 너무 일찍 시작해 망하는 확률이 더 큰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왜 지금이냐(Why Now)?’를 많이 생각한다. 스타트업이 내놓는 서비스나 제품을 사용자들이 얼마나 좋아하느냐가 중요하다.

엑싯(투자금 회수). 빨리 하는 것보다 크게 하는 것을 선호한다.

"투자 대상 스타트업을 어떻게 찾아내느냐?" (박희은 수석 답변) 8, 90%는 추천에 의해 투자한다. 투자한 회사 대표가 추천해준 기업을 좋게 생각한다. 요즘엔 창업자들이 페이스북을 많이 쓰고 있어서 평판 체크하기가 쉽다. 콜드 메일이 많이 오는데, 읽긴 읽는다. 답장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한 다리 건너 추천받아 검토하는 팀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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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리퍼블리카는 소개 받지 않고 투자했다. 퀄컴 행사장에서 6개 팀이 발표했는데 비바리퍼블리카가 인상적이었다. 다음날 만나서 한 달 후에 투자했다. 이승건 대표가 자기 꿈을 잘 설명해 줬다. 핀테크 쪽은 모르는 게 많아서 금융 쪽 사람을 불러 이 대표를 만나게 했다. 만나기로 한 날 금융 쪽 사람이 먼저 왔는데, 그분이 대뜸 “그 회사에 아직 투자 안 했죠?”라고 물었다. “안 했습니다” 했더니 “투자하지 마세요"라고 했다. 바로 직후에 이 대표가 와서 함께 얘기를 했는데, 미팅이 끝날 무렵에는 “투자 받을 때 우리 좀 끼워주세요”라고 말할 정도가 됐다. 이승건 대표, 설득력 있다. 그 정도 설득력이면 은행도 설득할 수 있고, 규제 때문에 문제가 생기면 국회 찾아가서 조리 있게 설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투자와 관련해) 후회스러운 일은 없나?” 리모택시에는 10억원 남짓 투자했는데 안 됐다. 하지만 ‘이런 실수는 자주 해도 된다’. 비트패킹은 후회가 된다. 사용자 수 백만명을 수 개월만에 만들었는데 우리가 더 열심히 못해서 그렇게 됐다. 회사는 200억원이 더 필요하다고 했는데 그걸 마련하지 못했다. 70%까지는 마련했는데 매듭을 짓지 못했다.

"투자할 때 실패 경험을 높이 사는가?" 우리가 투자한 스타트업 대표 중에는 신용불량자도 있다. 창업 경험은 아주 중요하게 생각한다. 창업을 경험해본 분은 고난이 닥쳤을 때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 우리가 투자한 스타트업의 80% 이상이 실패 경험이 있는 창업자다. ‘실패’라기보다는 창업을 해본 창업자를 선호한다. (끝)


2017년 7월 1일 토요일

메가스터디 손주은 회장 “빚 갚으려고 사업 한다"

메가스터디 손주은 회장의 강연을 들었다. 어제 서울 과학기술회관에서 열린 프라이머 데모데이 기조연설이었다. 손 회장이 대단한 분이라는 얘기는 들었지만, 직접 강연을 듣기는 처음이었다. 자신의 사업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긍정적인 마인드로 난관을 극복하고, 슬픔도 딛고 일어서고… “죽기 전에 내가 진 빚을 갚아야겠다는 마음으로 사업을 하고 있다”는 말이 귓전에 남았다. 강의 들으면서 메모한 내용을 공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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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전에 빚을 갚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윤민창의투자재단을 만들었다. 되돌아 보니 성공적인 인생은 아니었다. 내가 했던 비즈니스도 좋은 비즈니스는 아니었다. 젊은이들한테 열심히 공부하라고 권하고 그 과정에서 나는 돈을 벌었는데, 깨끗하게 돈을 번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재단을 만들었다. 다른 목적은 없다.

내가 10대 후반부터 가졌던 고민이 아직 풀리지 않았다. ‘부조리'다. 내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게 아니지 않냐. 내가 죽고 싶어서 죽는 것도 아니지 않냐. 인생이란 본질적으로 부조리한 것이다. 이 부조리의 근본적인 문제를 하나도 해결하지 못했다. 되돌아 보면 어설픈 삶을 살아온 것 같다. 나이가 들수록 부끄러움이 커진다.

내가 창업을 한 계기가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실연이다. 삼수해서 대학 들어갔는데 엄청난 절망에 빠졌다. 재수 삼수하면서 만났던 여자친구와 서울대 입학 직후 헤어졌다. 1981년에 대학교 1학년. 첫사랑과 헤어지면서 대학생활이 엉망이 됐다. 3학년 때는 완전히 무너졌다. 형편없는 생활을 했다. 그래서 휴학하고 군에 갔다. 당시에는 방위가 많았다. 방위 하면서 지금의 와이프를 만났다. 별 생각 없이 빨리 결혼하자고 했다. 대학교 두 학기 남긴 채 결혼했다. 어머니한테는 하숙비는 달라고 했다. 학비도 대 주시라고 했다. 와이프는 중학교 교사였는데 결혼한 뒤 그만뒀다.

와이프한테 돈이 얼마 있냐고 물었다. 400만원이 있다고 했다. 그 돈으로 신림2동에 열두 평짜리 다세대주택을 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가장 좋았던 집이다. 방 2개에 부엌 겸 거실, 욕실이 있는… 한두 달 살다 보니 그 돈으로는 어려웠다. 그래서 서울대 국문과 다니는 여동생을 데리고 하숙을 시작했다. 나름대로 풍족하게 살았다. 1987년 2월24일 IMF 경제위기가 터졌다. 그때 집사람이 “돈이 3만원밖에 안 남았다"고 했다. “걱정 마라, 내가 돈 벌어올께" 라고 큰소리쳤다. 하루 종일 생각해 봤는데 답이 없었다.

25일 답을 찾았다. 2월26일이 답이다. 서울대 졸업식이 매년 2월26일 열린다. 그때는 졸업식을 운동장에서 했다. 석박사를 합치면 졸업생이 1만명. 가족까지 오니까 졸업식 참석 인원이 2만명, 3만명이나 됐다. 그래, 졸업식장에서 커피 장사를 하자. 와이프한테, 내일 15만원 벌어올 테니 장사 밑돈 1만원만 달라고 했다. 옆집에 가서 커피포트 10개 빌려오고 남동생한테 친구 데려와서 같이 알바 하라고 하고… 아침 9시에 서울대 졸업식장으로 출격했다. 아니나 다를까 사람들이 엄청 왔다.

그런데 커피 부스가 20개, 30개 있는 게 아닌가. 부스에서 프로판 가스로 물 끓이고 토스트도 굽고… 이들은 전문 장사꾼이고, 우리는 보온병 들고 다니면서 팔아야 했다. 동생이 그랬다. 형님, 게임 끝났습니다. 돌아갈까 생각도 했는데, 우리가 나은 게 하나 있었다. 커피 부스는 고정돼 있어서 커피 마시고 싶은 사람은 부스로 가야 한다. 우리는 돌아다니며 팔 수 있었다. 졸업식장 안으로 들어가서 “축하합니다" 하면서 500원씩 받고 팔았다. 두 시간도 안돼 완판을 했다. 첫번째 창업은 이렇게 성공했다.

커피를 팔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이들은 똑같은 말을 했다. “어, 니가 이게 웬 일이냐?” 서울대생이 서울대 졸업식장에서 커피를 파는 게 말이 안된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다들 놀랐다. 우리는 목표를 달성했기에 동태찌개집 가서 저녁회식을 했다. 동생들한테 알바비도 챙겨주고… 그런데 그날 전화가 엄청 걸려왔다고 했다. 내가 받았더니 하숙집 아줌마였다. 사실 하숙할 때 아줌마 속을 많이 썩였다. 밤 늦게 들어오지, 낮 12시에 일어나서 밥 달라고 하지, 음악 크게 틀어놓지… 엄청 귀찮은 하숙생이었다. 졸업도 안 하고 결혼 하더니 졸업식장에서 커피 장사를 해? 그 말을 듣고 열 받아서 나한테 전화를 하셨다. 너 장가부터 가더니 꼴 좋다. 난리를 쳤다. 그렇게 사정이 어려우면 얘기를 할 것이지… 그러면서 과외할 곳을 소개해 주셨다.

3월2일 첫 과외를 시작했는데 그때 운명의 한 분을 만났다. 손 선생이 과외 가서 만난 여학생 이야기. 딱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얘는 공부 아니면 어떤 것도 구원할 수 없다. 가로 세로가 비슷하고, 온갖 고민에 찌든 얼굴… 내가 가르치는데 얼굴도 안 들고 대들었다. 그래서 탁자를 탁 치면서 “5분만 얘기 하자"고 했다. 너는 공부 안 하면 어떤 것도 너를 구원 못해! 이렇게 말했더 고개를 들고 노려봤다. 너는 공부도 엉망이고… 이렇게 살면 니 인생은 창녀보다 못할 거다. 공부 안 하면 결국 미국으로 유학 보낼 거고, 성형하고 몸매관리 하고 들어와서 너를 팔겠지. 한 재산 싸들고 시집 가겠지. 그게 뭐냐. 창녀는 화대라도 받는데 너는 돈까지 갖다 바치고… 대접 받으며 살 것 같냐? 그랬더니 이 학생이 눈 치켜들고는, 당신 맘에 든다, 나도 그런 고민 하고 있다… 이랬다. 영어는 고등학생 수준인데, 수학은 초등학교 4, 5학년 수준이었다. 그랬던 그 학생이 행정고시를 차석으로 합격했다. 지금은 고위 공직자다. 이 학생 성적이 올라가니까 소문이 났다. 방학 때는 이 학생 집이 있는 잠원동 아파트에서 층층이 내려오면서 한 시간 간격으로 과외를 했다. 이 학생 때문에 이 길로 들어서게 됐다.

졸업식장에서 “게임 끝났다"고 해서 그만뒀더라면 어떻게 됐겠는가. 친구들이 “니가 웬 일이냐?”고 했을 때 도망갔다면 나는 이 여자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강의를 잘하는 줄도 몰랐을 것이다. 나한테 어떤 자질이 있는지 찾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과외를 하게 됐는데… 과외를 인생의 직업으로 할 수는 없지 않냐.

87년 8월 졸업을 했는데 답이 안 보였다. 고민을 하다가 타협을 좀 했다. 2년쯤 열심히 과외를 해서 1억원을 모아 독일로 유학을 가자… 이렇게 생각하고 2년 동안 과외를 했다. 학원 가서 하는 과외로는 안된다. 아무리 많이 벌어도 월 100만원 남짓 아니냐. 그때 월급쟁이 초임이 30만원쯤 됐다. 그래서 혼자 전 과목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실제로 2년 간 2억원을 벌었다. 혼자 전 과목을 하다 보니 일반적인 방법이 아닌 걸 썼다. 여름방학 때는 9박10일 지옥훈련을 했다. 터미날 옆에 있는 50평형대 집에서 했다. 그집 아이는 공짜, 나머지 9명 어머니들한테는 하루씩 와서 밥을 하라고 했다. 10명이 9박10일 지옥훈련. 학생들 신발을 욕조에 빠뜨려놓고 못 나가게 했다. 시작할 땐 군에서 하는 PT체조로 혼을 빼 놨다. 그때는 학력고사에 암기과목이 많았는데 하루 한 과목씩 끝냈다. 일정 수준에 달하지 않으면 잠자리에 들지 못하게 했다.

독서실 사업도 했다. 독서실 2개 인수해서 총무 앉혀놓고 사업을 했는데 오래 할 일은 못됐다. 특히 아버지가 야단 치셨다. 니는 내 아들 아니다, 서울대까지 나와서 뭐 하고 자빠졌냐… 하셨다. 명절 앞두고 전화를 했더니, 앞으로는 내려오지 마라, 하셨다. 독서실 사업 2년 하고 접었다. 이번엔 아버지 꿈대로 해 보기로 했다. 아버지는 내가 판사나 검사가 되길 원했다. 그래서 사시 공부를 하고 5월8일 1차 시험을 치렀는데… 공부 안했다. 일주일 하고는 때려치웠다. 나는 당구를 44시간 연속으로 친 적도 있다. 첫사랑과는 2시간 반 동안 키스를 하기도 했다. 내가 몰입을 잘 하는 편이다. 두세 달 공부하고 사시를 봤는데 그 다음날 아주머니들이 여럿 찾아왔다. 다시 시작하시죠, 우리 애들 급합니다. 그때 답이 안 보여서 학생들 가르치는 일을 다시 시작했다.

90년 9월15일. 아들, 딸, 와이프가 교회에서 예배 마치고 돌아오다가 교통사고가 나서 아들이 죽었다. 와이프랑 딸은 의식불명이 됐다. 일주일 간은 정말 힘들었다. 신한테 엄청 매달렸는데… 허탈했다. 와이프랑 딸이 한 달만에 깨어났고 세 달만에 퇴원했다. 정상이 아닌 두살배기 딸.. 5월에는 다친 곳이 재발했다. 6월에는 딸도 죽었다. 딸이 죽고 나니까… 내가 망했구나, 완전히 망했구나, 싶었다. 가족들한테 빨리 묻자고 했다. 오후 3시에 충북 공원묘지에 묻었다. 집으로 돌아와 한 시간쯤 자고 오후 6시에 학원 가서 수업을 했다. 다른 답이 없었다. 일주일에 60시간, 72시간씩… 엄청 강의를 했다.

학생들 가르치면서 안정이 됐다. 96년에는 1년 간 인생을 되돌아보며 이런 결론을 내렸다. 비즈니스를 하자. 되돌아 보니 87년부터 내가 늘 윤리 고민을 했다. 소수 학생들한테 강의를 했는데, 사회윤리적으로 보면 부잣집 아이들 성적 끌어올려준 거 아니냐, 그러면 가난한 집 아이는 이유도 모른 채 떨어진다, 사교육, 문제다. 내가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역할만 하고 있는 것 아니냐. 서른여섯에 이런 고민을 했다. 그 당시 학원에서 벌어들이는 돈이 월 4, 5천만원은 됐다. 지금으로 치면 월 2억원쯤 된다. 그런 사업을 접었다. 어머니는 “목사가 돼라”고 하셨다. 지금도 어머니는 “아직도 늦지 않았다"고 하신다. 내가 목사 하기에는 너무 많이 타락했다. 이건 아니다.

그래서 불쑥 꺼내든 답 중 하나가 학교다. 학교를 만들면 잘하지 않겠냐, 제2의 상상고를 만들자. 이런 거였다. 그런데, 생각할수록 찜찜했다. 내가 고민하는 게 교육에 대한 고민이 아니라 그럴싸한 지위와 명예를 얻으려는 얄팍할 술수가 아닌가. 많이 울었다. 여러분도 성공하면 타락할 수 있다. 돈 뒤에는 타락이 온다. 다시 고민했다. 학교를 만들고 싶은데, 아직도 ‘사농공상’ 의식이 남아 있고 ‘사'자를 존중하지 않냐. 사농공상은 생산성이 낮은 농업사회에서 나온 사회구조다. 지금은 생산성이 엄청 좋아졌다. 반대가 돼야 한다, ‘상공농사’가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비즈니스 하게 된 이유다. 이들이 존경받는 사회가 돼야 하는데 아직도 공무원 정치인이 대접받는다. 서른여섯에 그런 고민을 하고 윤리 문제를 해결하려고 기업을 하기로 했다.

기업을 하려고 보니 무얼 할까? 고민이 됐다. 강의. 이것으로 기업을 하자, 그 대신 사회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일은 하지 말자, 그랬다. 92년 11월31일 경기도 이천 가서 2000년 이후 무얼 할까 구상했다. 그것이 ‘이천구상'이다. 34시간 잠도 안 자고 고민해서 답을 찾았다. 지금도 내 방에 걸어놓고 있다. ‘Root 97 신화창조'다. 마흔살이 되는 97년 이후 비전이다. 기업 경영 철학으로 R(Reasonable, 합리적인), O(Organic, 조직적인), O(Open, 열린 마음), T(Together, 함께) 4가지를 정했다.

그리고는 대중강의부터 시작했다. 통합사회 강의를 했는데, 처음엔 8명이던 수강생이 2천명, 5천명으로 늘었다. 99년에는 홈쇼핑을 보다가, 백화점이 집으로 오는구나, 그럼 학교가 집으로 오고 학원이 집으로 오면 되겠네, 라고 생각했다. 2000년 아무것도 모른 상태에서 회사를 만들었다. 내가 지분 70%를 갖고 강사들한테 1억씩 내게 해 지분을 갖게 했다. 이로써 온라인 강의 상용화에는 성공했지만 오프라인을 온라인으로 옮겨놓는데 그쳤다. 오프라인 생태계를 근본적으로 바꾸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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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생략. 손주은 회장의 강의 마지막 부분은 듣지 못했다. 급한 전화가 걸려오는 바람에 밖으로 나가서 받아야 했다. 그래도 오래 여운이 남는 강의였다. 울림이 큰 강의였다.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며 살아온 기업인. 난관을 똘끼로 극복하고, 슬픔을 일 몰입으로 이겨낸 분, 메가스터디 손주은 회장. 윤민창의투자재단을 통해 후배 창업자들에게 큰 힘이 돼 주길 기대한다. (사진제공: 프라이머 이정훈 팀장,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