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가스터디 손주은 회장의 강연을 들었다. 어제 서울 과학기술회관에서 열린 프라이머 데모데이 기조연설이었다. 손 회장이 대단한 분이라는 얘기는 들었지만, 직접 강연을 듣기는 처음이었다. 자신의 사업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긍정적인 마인드로 난관을 극복하고, 슬픔도 딛고 일어서고… “죽기 전에 내가 진 빚을 갚아야겠다는 마음으로 사업을 하고 있다”는 말이 귓전에 남았다. 강의 들으면서 메모한 내용을 공유한다.
죽기 전에 빚을 갚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윤민창의투자재단을 만들었다. 되돌아 보니 성공적인 인생은 아니었다. 내가 했던 비즈니스도 좋은 비즈니스는 아니었다. 젊은이들한테 열심히 공부하라고 권하고 그 과정에서 나는 돈을 벌었는데, 깨끗하게 돈을 번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재단을 만들었다. 다른 목적은 없다.
내가 10대 후반부터 가졌던 고민이 아직 풀리지 않았다. ‘부조리'다. 내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게 아니지 않냐. 내가 죽고 싶어서 죽는 것도 아니지 않냐. 인생이란 본질적으로 부조리한 것이다. 이 부조리의 근본적인 문제를 하나도 해결하지 못했다. 되돌아 보면 어설픈 삶을 살아온 것 같다. 나이가 들수록 부끄러움이 커진다.
내가 창업을 한 계기가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실연이다. 삼수해서 대학 들어갔는데 엄청난 절망에 빠졌다. 재수 삼수하면서 만났던 여자친구와 서울대 입학 직후 헤어졌다. 1981년에 대학교 1학년. 첫사랑과 헤어지면서 대학생활이 엉망이 됐다. 3학년 때는 완전히 무너졌다. 형편없는 생활을 했다. 그래서 휴학하고 군에 갔다. 당시에는 방위가 많았다. 방위 하면서 지금의 와이프를 만났다. 별 생각 없이 빨리 결혼하자고 했다. 대학교 두 학기 남긴 채 결혼했다. 어머니한테는 하숙비는 달라고 했다. 학비도 대 주시라고 했다. 와이프는 중학교 교사였는데 결혼한 뒤 그만뒀다.
와이프한테 돈이 얼마 있냐고 물었다. 400만원이 있다고 했다. 그 돈으로 신림2동에 열두 평짜리 다세대주택을 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가장 좋았던 집이다. 방 2개에 부엌 겸 거실, 욕실이 있는… 한두 달 살다 보니 그 돈으로는 어려웠다. 그래서 서울대 국문과 다니는 여동생을 데리고 하숙을 시작했다. 나름대로 풍족하게 살았다. 1987년 2월24일 IMF 경제위기가 터졌다. 그때 집사람이 “돈이 3만원밖에 안 남았다"고 했다. “걱정 마라, 내가 돈 벌어올께" 라고 큰소리쳤다. 하루 종일 생각해 봤는데 답이 없었다.
25일 답을 찾았다. 2월26일이 답이다. 서울대 졸업식이 매년 2월26일 열린다. 그때는 졸업식을 운동장에서 했다. 석박사를 합치면 졸업생이 1만명. 가족까지 오니까 졸업식 참석 인원이 2만명, 3만명이나 됐다. 그래, 졸업식장에서 커피 장사를 하자. 와이프한테, 내일 15만원 벌어올 테니 장사 밑돈 1만원만 달라고 했다. 옆집에 가서 커피포트 10개 빌려오고 남동생한테 친구 데려와서 같이 알바 하라고 하고… 아침 9시에 서울대 졸업식장으로 출격했다. 아니나 다를까 사람들이 엄청 왔다.
그런데 커피 부스가 20개, 30개 있는 게 아닌가. 부스에서 프로판 가스로 물 끓이고 토스트도 굽고… 이들은 전문 장사꾼이고, 우리는 보온병 들고 다니면서 팔아야 했다. 동생이 그랬다. 형님, 게임 끝났습니다. 돌아갈까 생각도 했는데, 우리가 나은 게 하나 있었다. 커피 부스는 고정돼 있어서 커피 마시고 싶은 사람은 부스로 가야 한다. 우리는 돌아다니며 팔 수 있었다. 졸업식장 안으로 들어가서 “축하합니다" 하면서 500원씩 받고 팔았다. 두 시간도 안돼 완판을 했다. 첫번째 창업은 이렇게 성공했다.
커피를 팔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이들은 똑같은 말을 했다. “어, 니가 이게 웬 일이냐?” 서울대생이 서울대 졸업식장에서 커피를 파는 게 말이 안된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다들 놀랐다. 우리는 목표를 달성했기에 동태찌개집 가서 저녁회식을 했다. 동생들한테 알바비도 챙겨주고… 그런데 그날 전화가 엄청 걸려왔다고 했다. 내가 받았더니 하숙집 아줌마였다. 사실 하숙할 때 아줌마 속을 많이 썩였다. 밤 늦게 들어오지, 낮 12시에 일어나서 밥 달라고 하지, 음악 크게 틀어놓지… 엄청 귀찮은 하숙생이었다. 졸업도 안 하고 결혼 하더니 졸업식장에서 커피 장사를 해? 그 말을 듣고 열 받아서 나한테 전화를 하셨다. 너 장가부터 가더니 꼴 좋다. 난리를 쳤다. 그렇게 사정이 어려우면 얘기를 할 것이지… 그러면서 과외할 곳을 소개해 주셨다.
3월2일 첫 과외를 시작했는데 그때 운명의 한 분을 만났다. 손 선생이 과외 가서 만난 여학생 이야기. 딱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얘는 공부 아니면 어떤 것도 구원할 수 없다. 가로 세로가 비슷하고, 온갖 고민에 찌든 얼굴… 내가 가르치는데 얼굴도 안 들고 대들었다. 그래서 탁자를 탁 치면서 “5분만 얘기 하자"고 했다. 너는 공부 안 하면 어떤 것도 너를 구원 못해! 이렇게 말했더 고개를 들고 노려봤다. 너는 공부도 엉망이고… 이렇게 살면 니 인생은 창녀보다 못할 거다. 공부 안 하면 결국 미국으로 유학 보낼 거고, 성형하고 몸매관리 하고 들어와서 너를 팔겠지. 한 재산 싸들고 시집 가겠지. 그게 뭐냐. 창녀는 화대라도 받는데 너는 돈까지 갖다 바치고… 대접 받으며 살 것 같냐? 그랬더니 이 학생이 눈 치켜들고는, 당신 맘에 든다, 나도 그런 고민 하고 있다… 이랬다. 영어는 고등학생 수준인데, 수학은 초등학교 4, 5학년 수준이었다. 그랬던 그 학생이 행정고시를 차석으로 합격했다. 지금은 고위 공직자다. 이 학생 성적이 올라가니까 소문이 났다. 방학 때는 이 학생 집이 있는 잠원동 아파트에서 층층이 내려오면서 한 시간 간격으로 과외를 했다. 이 학생 때문에 이 길로 들어서게 됐다.
졸업식장에서 “게임 끝났다"고 해서 그만뒀더라면 어떻게 됐겠는가. 친구들이 “니가 웬 일이냐?”고 했을 때 도망갔다면 나는 이 여자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강의를 잘하는 줄도 몰랐을 것이다. 나한테 어떤 자질이 있는지 찾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과외를 하게 됐는데… 과외를 인생의 직업으로 할 수는 없지 않냐.
87년 8월 졸업을 했는데 답이 안 보였다. 고민을 하다가 타협을 좀 했다. 2년쯤 열심히 과외를 해서 1억원을 모아 독일로 유학을 가자… 이렇게 생각하고 2년 동안 과외를 했다. 학원 가서 하는 과외로는 안된다. 아무리 많이 벌어도 월 100만원 남짓 아니냐. 그때 월급쟁이 초임이 30만원쯤 됐다. 그래서 혼자 전 과목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실제로 2년 간 2억원을 벌었다. 혼자 전 과목을 하다 보니 일반적인 방법이 아닌 걸 썼다. 여름방학 때는 9박10일 지옥훈련을 했다. 터미날 옆에 있는 50평형대 집에서 했다. 그집 아이는 공짜, 나머지 9명 어머니들한테는 하루씩 와서 밥을 하라고 했다. 10명이 9박10일 지옥훈련. 학생들 신발을 욕조에 빠뜨려놓고 못 나가게 했다. 시작할 땐 군에서 하는 PT체조로 혼을 빼 놨다. 그때는 학력고사에 암기과목이 많았는데 하루 한 과목씩 끝냈다. 일정 수준에 달하지 않으면 잠자리에 들지 못하게 했다.
독서실 사업도 했다. 독서실 2개 인수해서 총무 앉혀놓고 사업을 했는데 오래 할 일은 못됐다. 특히 아버지가 야단 치셨다. 니는 내 아들 아니다, 서울대까지 나와서 뭐 하고 자빠졌냐… 하셨다. 명절 앞두고 전화를 했더니, 앞으로는 내려오지 마라, 하셨다. 독서실 사업 2년 하고 접었다. 이번엔 아버지 꿈대로 해 보기로 했다. 아버지는 내가 판사나 검사가 되길 원했다. 그래서 사시 공부를 하고 5월8일 1차 시험을 치렀는데… 공부 안했다. 일주일 하고는 때려치웠다. 나는 당구를 44시간 연속으로 친 적도 있다. 첫사랑과는 2시간 반 동안 키스를 하기도 했다. 내가 몰입을 잘 하는 편이다. 두세 달 공부하고 사시를 봤는데 그 다음날 아주머니들이 여럿 찾아왔다. 다시 시작하시죠, 우리 애들 급합니다. 그때 답이 안 보여서 학생들 가르치는 일을 다시 시작했다.
90년 9월15일. 아들, 딸, 와이프가 교회에서 예배 마치고 돌아오다가 교통사고가 나서 아들이 죽었다. 와이프랑 딸은 의식불명이 됐다. 일주일 간은 정말 힘들었다. 신한테 엄청 매달렸는데… 허탈했다. 와이프랑 딸이 한 달만에 깨어났고 세 달만에 퇴원했다. 정상이 아닌 두살배기 딸.. 5월에는 다친 곳이 재발했다. 6월에는 딸도 죽었다. 딸이 죽고 나니까… 내가 망했구나, 완전히 망했구나, 싶었다. 가족들한테 빨리 묻자고 했다. 오후 3시에 충북 공원묘지에 묻었다. 집으로 돌아와 한 시간쯤 자고 오후 6시에 학원 가서 수업을 했다. 다른 답이 없었다. 일주일에 60시간, 72시간씩… 엄청 강의를 했다.
학생들 가르치면서 안정이 됐다. 96년에는 1년 간 인생을 되돌아보며 이런 결론을 내렸다. 비즈니스를 하자. 되돌아 보니 87년부터 내가 늘 윤리 고민을 했다. 소수 학생들한테 강의를 했는데, 사회윤리적으로 보면 부잣집 아이들 성적 끌어올려준 거 아니냐, 그러면 가난한 집 아이는 이유도 모른 채 떨어진다, 사교육, 문제다. 내가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역할만 하고 있는 것 아니냐. 서른여섯에 이런 고민을 했다. 그 당시 학원에서 벌어들이는 돈이 월 4, 5천만원은 됐다. 지금으로 치면 월 2억원쯤 된다. 그런 사업을 접었다. 어머니는 “목사가 돼라”고 하셨다. 지금도 어머니는 “아직도 늦지 않았다"고 하신다. 내가 목사 하기에는 너무 많이 타락했다. 이건 아니다.
그래서 불쑥 꺼내든 답 중 하나가 학교다. 학교를 만들면 잘하지 않겠냐, 제2의 상상고를 만들자. 이런 거였다. 그런데, 생각할수록 찜찜했다. 내가 고민하는 게 교육에 대한 고민이 아니라 그럴싸한 지위와 명예를 얻으려는 얄팍할 술수가 아닌가. 많이 울었다. 여러분도 성공하면 타락할 수 있다. 돈 뒤에는 타락이 온다. 다시 고민했다. 학교를 만들고 싶은데, 아직도 ‘사농공상’ 의식이 남아 있고 ‘사'자를 존중하지 않냐. 사농공상은 생산성이 낮은 농업사회에서 나온 사회구조다. 지금은 생산성이 엄청 좋아졌다. 반대가 돼야 한다, ‘상공농사’가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비즈니스 하게 된 이유다. 이들이 존경받는 사회가 돼야 하는데 아직도 공무원 정치인이 대접받는다. 서른여섯에 그런 고민을 하고 윤리 문제를 해결하려고 기업을 하기로 했다.
기업을 하려고 보니 무얼 할까? 고민이 됐다. 강의. 이것으로 기업을 하자, 그 대신 사회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일은 하지 말자, 그랬다. 92년 11월31일 경기도 이천 가서 2000년 이후 무얼 할까 구상했다. 그것이 ‘이천구상'이다. 34시간 잠도 안 자고 고민해서 답을 찾았다. 지금도 내 방에 걸어놓고 있다. ‘Root 97 신화창조'다. 마흔살이 되는 97년 이후 비전이다. 기업 경영 철학으로 R(Reasonable, 합리적인), O(Organic, 조직적인), O(Open, 열린 마음), T(Together, 함께) 4가지를 정했다.
그리고는 대중강의부터 시작했다. 통합사회 강의를 했는데, 처음엔 8명이던 수강생이 2천명, 5천명으로 늘었다. 99년에는 홈쇼핑을 보다가, 백화점이 집으로 오는구나, 그럼 학교가 집으로 오고 학원이 집으로 오면 되겠네, 라고 생각했다. 2000년 아무것도 모른 상태에서 회사를 만들었다. 내가 지분 70%를 갖고 강사들한테 1억씩 내게 해 지분을 갖게 했다. 이로써 온라인 강의 상용화에는 성공했지만 오프라인을 온라인으로 옮겨놓는데 그쳤다. 오프라인 생태계를 근본적으로 바꾸진 못했다.
이하 생략. 손주은 회장의 강의 마지막 부분은 듣지 못했다. 급한 전화가 걸려오는 바람에 밖으로 나가서 받아야 했다. 그래도 오래 여운이 남는 강의였다. 울림이 큰 강의였다.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며 살아온 기업인. 난관을 똘끼로 극복하고, 슬픔을 일 몰입으로 이겨낸 분, 메가스터디 손주은 회장. 윤민창의투자재단을 통해 후배 창업자들에게 큰 힘이 돼 주길 기대한다. (사진제공: 프라이머 이정훈 팀장, 끝)